안개 속에서 보는 승리
— 요셉과 니고데모, 패배처럼 보이는 승리에 대하여
도입=========
갈보리 언덕에 해가 지던 그날, 그 자리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목적을 이룬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성공한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입니다.
그들은 승리자의 얼굴로 그 언덕을 떠났습니다.
다른 한쪽은 모든 것을 잃고 짓밟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죽은 죄수의 시신을 수습하며 자기 신분과 지위를 걸어야 했던 요셉과 니고데모.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그들은 십자가 밑에서 조용히 무덤을 준비했습니다.
그날 저녁, 같은 무덤을 사이에 두고 있던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누가 진짜 승리자였습니까?
겉모습은 우리를 속입니다. 오늘 본문은 승리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 승리 사이의 간격을 정직하게 보여줍니다.
1.세상이 얻으려는 승리
① 평안없는 승리
대제사장들은 원하는 것을 다 얻었습니다.
무덤을 봉인했습니다. 파수꾼을 세웠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였습니다. 뜻대로 다 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은 흐뭇했을까요? 기뻤을까요? 그동안 앓던 체증이 쑥 내려갔을까요?
아닙니다.
『시대의 소망』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들의 승리가 분명해진 시간에도 그들은 다음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괴로움을 당했다." 그들은 안식일에도 쉴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의 집 문지방조차 밟지 않으려고 정결법은 철저히 지키면서, 동시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에 로마 인장을 찍고 백부장을 세우고 밤새 잠자지 못하고 무덤을 지키게 이방인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모순된 행동을 합니다.
형식은 지켰지만 내면은 무너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보다 그분이 죽으신 지금, 그들은 더 두려워했습니다.
[예화 — 마이클 펠프스]올림픽 수영 역사상 가장 많은 금메달을 딴 선수, 마이클 펠프스는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숙소로 돌아온 뒤 며칠간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직접 고백했습니다.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뤘는데, 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무너진 순간은 실패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도 그랬습니다. 목적을 다 이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들은 편히 잤을까요?
죄인의 방법으로, 세상의 방법으로 승리를 얻으면 남는 것은 불안과 걱정과 초조뿐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제 그에게 잔소리하는 사람도, 비교할 상대도 사라졌습니다. 자유롭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행복했습니까? "내 죄벌이 지기에 너무 무거우니이다"(창 4:13).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4). 이겼지만 평안을 잃었습니다.
다윗은 원하는 뜻을 이뤘습니다. 밧세바를 취했습니다. 완전범죄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잠잠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 32:3).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을 받아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곧바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며 그 돈을 던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마 27:3-5).
<적용> 우리도 이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통쾌하게 한방 날렸습니다. 상대방을 꼼짝하지 못하게, 논리로 주저 앉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옳았습니다.
그래서 힘으로든, 논리로든, 완벽한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찜~찜하고, 불안하고, 답답했던 적이 없습니까?
진짜 이긴 것입니까? 참으로 승리자가 된 것 맞습니까?
시편 2편의 선언이 이 모든 사례를 관통합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시 2:1,4). 목적을 이루는 것과 평안을 얻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승리는 반드시 그 대가로 새로운 불안을 요구합니다.
부부간에, 자녀와 부모간에, 직장동료간에, 이웃간에 — 우리는 수많은 크고 작은 전쟁을 치릅니다. 완벽한 논리로, 혹은 힘으로, 때로는 악으로 강하게 상대를 제압해서 이겼다고 자축합니다. 흐뭇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관계는 깨지고, 씁쓸한 뒷맛만 남습니다. 이건 승리가 아닙니다.
결단의 호소 여러분, 지금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겼다는 그 사람 — 오늘 밤 편히 주무실 수 있습니까? 혹 우리는 평안이 없는 세상의 승리를 위해 애쓰지 않습니까? 우리의 승리 후에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면, 하나님은 오늘 그 승리를 내려놓으라 말씀하십니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승리를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 마음에 떠오르는 그 승리를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② 오래 가지 못하는 승리
"무릇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하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만은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나무를 준비했습니다(에 7:10). 자기가 이긴 줄 알았습니다. 자기에게 힘이 있으니, 왕을 설득해서 인장 반지를 이용해 모르드개를 죽일 수 있다고, 아니 모르드개뿐 아니라 그의 모든 민족까지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순식간에 뒤집혔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그 나무에 달렸습니다.
우리 살면서 이런 경우를 얼마나 많이 겪습니까? 승리했다고 생각한 순간, 그 승리가 열흘, 아니 채 하루도 못 가고 씁쓸해질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결단의 호소: 여러분 우리의 승리가 하만의 장대와 같은 승리는 아닙니까? 혹 오늘도 그런 장대를 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내가 세우고 있는 그 승리의 장대, 혹시 나를 향한 것은 아닙니까? 평화가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깨지고 말 그런 승리, 지금 이 자리에서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③진짜 승리는 사랑으로 이기는 것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승리는 상대를 넘어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으로, 감동으로, 선한 감화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벧전 2:23).
다윗을 보십시오. 굴속에서 사울의 옷자락만 벨 수 있었을 때, 광야에서 사울이 잠들어 창과 물병만 가져올 수 있었을 때, 다윗은 말했습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삼상 24:6).
사울은 다윗을 죽이는 것이 승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승리가 무엇인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말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논쟁에서 내 의견을 관철시킬 수 있습니다. 사업에서 경쟁자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다.
제가 여러번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다양한 경쟁, 인간 관계, 상황 속에서 평안을 잃었다면, 이미 진 것입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사라졌다면 싸움에서 진 것입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어떤 곳에서도— 기쁨이 주요한 감정이 되어야 합니다.
결단의 호소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이기려던 마음을 내려놓고 화평을 택하시겠습니까? 지금 마음에 떠오르는 그 얼굴이 있다면, 오늘이 그 관계를 회복할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대지 4. 하늘이 얻으려는 승리
①요셉과 니고데모: 패배처럼 보였던 진짜 승리
요셉과 니고데모는 세상 기준으로 손해 보는 선택을 선택했습니다. 패배자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엄청난 부와 명예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산헤드린회원- 온 나라에 70명밖에 되지 않는 국회의원 뱃지를 달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평생 – 종신 국회의원, 그 명예가 어떠합니까? 그리고 니고데모와 요셉은 손꼽히는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 이들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로마의 반역자로 처형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빌라도에게 가서 요구합니다. 그리고 손수 그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세마포로 싸고,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정성껏 장례를 준비합니다.
니고데모가 준비한 몰약과 침향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아세요?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가 삼백데나리온이라고 하지요. 노동자 1년 연봉.
마리아가 가져온 향유는 향수 1병이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침향은
요 19: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100 리트라: 33KG입니다. 마리아가 가져온 향유보다 100배도 넘어도
마리아 1년치, 니고데모 100년치 연봉??
연봉이 1억이라면 100억, 5천만원 – 50억...
마리아의 낭비는 아무것도 아니죠?
마리아는 산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에게 부었다고 하지만,
니고데모는 죽은 사람, 그것도 반역죄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어 죽어버린 시체에게..
그 낭비는 이루 말할 수 없어요.
누가 죽어버린 시체에 죄수의 시체에 50억, 100억의 향수를 붓습니까?
이것은 황제의 장례식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왜 그런 무모한 일을 합니까?
『시대의 소망』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을 뿔뿔이 흩어버린 바로 그 사건이 요셉과 니고데모의 예수님 신앙을 확신시켜 주었다." 니고데모는 이 일이 승리의 길이며, 승리의 축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의 공포심은 오히려 확고한 신앙의 용기가 드러나게 했던 것이빈다.
그동안 숨겨왔던 믿음이 가장 어두운 순간에 가장 담대해졌습니다.
[예화 — 오스카 쉰들러] 전에도 말씀드렸죠.
독일인이 유대인 포로들 한명이라도 더 살리려고— 포로수용소에서 사람을 사옵니다. 전 재산을 다 쏟습니다. 공장을 짓고, 포탄을 만들어요. 그러나 기술자가 없어서— 잘 만들어진 포탄을 멀리에서 몰래 사와서 공급해요. 그러나 전쟁이 끝났을 때 오스카 쉰들러는 빈털터리가 되어 도망치듯 독일을 떠났습니다. 그 순간 그는 누가 봐도 '실패한 사업가', '패망한 나라 편에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 뒤, 그의 이름은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독일인으로써 유일하게 '열방의 의인' 명단에 새겨졌습니다. 그가 구한 사람들의 후손 6천여 명이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그날 밤 그의 손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역사는 그를 승리자로 기록했습니다.
그날, 자기 무덤과 자기 지위를 예수님의 시신에 걸었던 요셉도 똑같았습니다. 당장은 손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의 믿음은 하루아침에 자란 것이 아닙니다. 3년에 걸쳐 서서히 무르익은 결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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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요 3장)—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와 "우리가 아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분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계속 주목합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 그분이 하신 말씀, 그분의 품성, 사람들의 평가—계속해서 바라봅니다.
“니고데모는 얼마 동안은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시인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생애를 주목하고 그의 교훈을 숙고하였다.”(소망, 176)
하늘의 진리를 구했지만, 남의 눈을 의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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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 (요 7:50-52)— 산헤드린 회의석상에서 동료들에게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기 전에는 판결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여전히 이름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남 몰래 주님을 사모하고, 조용히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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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요 19:39)— 몰약과 침향 백 근을 들고 완전히 전면에 나섰습니다. 밤에 왔던 그가 마침내 백주 대낮에 나섰습니다.
“자신을 살해하는 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와 죽어가는 강도의 간청에 대한 그분의 대답이 학식 많은 의원(議員)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그는 고민 중에 계신 구주를 바라보았고 정복자의 말처럼 “다 이루었다”는 마지막 부르짖음을 들었다. 그는 다시 흔들리는 땅과 어두워진 하늘과 찢어진 휘장과 터진 바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그의 믿음은 영원히 굳게 확립되었다. ”(소망, 775)
예수님을 깊이 묵상한 것입니다. 십자가로 가시는 그분의 모습을 깊이 살폈습니다.
전에 말씀하신 그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4)
로마 군인들이 못을 박을 때, 욕을 하거나,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으시며 대신-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하는 기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사 53:7)
운명하시면서 외치신 “"다 이루었다."(요 19:30)”의 말씀의 의미를 깊이 묵상했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하는 외침을 들었습니다.
"내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시 31:5)
돌아가실 때 천재 지변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전에서 휘장이 찢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막 15:38) 사건과 환경을 영적인 눈으로 깊이 깊이 살핀 것입니다.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 27:51)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눅 23:44-45)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마 27:54)
같은 십자가를 보았지만, 대제사장들은 사건만 보았습니다. 니고데모는 말씀으로 그 사건을 해석했습니다. 같은 천재지변을 보았지만, 군중은 두려워했고 니고데모는 믿음을 얻었습니다. 믿음은 새로운 사건을 보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같은 사건을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막 4:26-29)처럼, 사람의 씨를 뿌려 밤에 자든지 낮에 깨든지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 믿음도 오랜 침묵 속에서 자라나 어느 순간 완숙하게 열매를 맺습니다.
시므온과 안나스(눅 2:25-38)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고, 성령이 그 위에 계셔서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지시를 오래도록 품고 살았습니다. 안나는 84세가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아기 예수를 본 순간, 그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지만 — 그 즉각성은 수십 년간 쌓인 기다림의 결과였습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 (막 5:25-34) — 12년 동안 고통받으며 "만일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손길은 한순간이었지만, 그 확신은 12년의 절망 속에서 자란 것이었습니다.
호소: 우리도 오래 오래 믿음의 여정을 가야합니다. 비가오고, 바람, 눈보라-- 묵묵히 이 길을 가십시다. 그리고 큰 결단을 해야하는 순간이 오거든— 담대히 결단하십시다.
반대로 자란 나무: 가룟유다
니고데모, 요셉과 마찬가지로 3년 동안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증거, 같은 시간이 그에게는 정반대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 믿음이 아니라 배신. 오래 지켜보는 것 자체가 믿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지켜봄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믿음을 만듭니다.
결단의 호소 니고데모도 처음부터 담대하지 않았습니다. 밤에 찾아왔던 그가 마침내 백주 대낮에 나섰습니다. 여러분의 믿음도 오늘 당장 완벽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예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나? 오늘은 또 어떤 말씀을 하셨나? 묵묵히 바라보았습니다. 매일, 한 걸음 또 한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예수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앞으로 나아가십시다.
니고데모와 요셉의 믿음은 순간의 감동이 아니라, 오랜 시간 예수님의 삶 — 가르침, 기적, 인내, 원수를 위한 기도 — 을 지켜보며 쌓인 확신이었습니다.
대조: 베드로의 성급한 확신 (마 26:33-35, 69-75) —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던 확신이 몇 시간 뒤 저주하며 부인하는 것으로 무너졌습니다. 감정 위에 세운 믿음은 위기 앞에서 흔들립니다.
병행: 아브라함 (히 11:8-10, 롬 4:19-21) —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아브라함의 믿음도 오랜 세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지켜본 결과였습니다.
-- 아들을 제물로 바친다??? -- 오랜 세월 하나님을 체험하고, 지켜보았기에 가능하다.
-부활의 주님을 깨달은 것임...
마지막 결단의 호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보리 언덕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대제사장도 보았습니다. 군중도 보았습니다. 백부장도 보았습니다.
요셉도 보았습니다. 니고데모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같은 것을 보고도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우리가 이겼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니고데모와 요셉은 "아니다. 이제 하나님의 승리가 시작되었다." 라고 믿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같은 십자가를 보았지만, 누구는 사건만 보았고 누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믿음은 특별한 것을 보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같은 사건을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니고데모는 하루아침에 그런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의 발걸음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앞에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이것이 승리였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날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병은 낫지 않고,
사업은 무너지고,
가정은 흔들리고,
믿음도 희미해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말합니다.
"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십자가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무덤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우리는 지금 안개 속에서 승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안개가 끼면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길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잠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십자가도 그랬습니다.
금요일 저녁까지는
모든 것이 안개였습니다.
그러나 일요일 새벽,
안개가 걷히자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패배인 줄 알았던 십자가는
세상을 구원한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혹시 오늘 여러분의 인생에도 안개가 끼어 있습니까?
가정에도 안개가 있습니까?
자녀에게도 안개가 있습니까?
건강에도,
사업에도,
교회에도,
믿음에도 안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안개를 바라보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말씀으로 오늘의 사건을 해석하십시오.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언젠가 여러분도 뒤돌아보며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패배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그 순간에도 나를 가장 큰 승리로 이끌고 계셨습니다.“